Korea of Today with Scania
한국전쟁은 동양의 작은나라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린 슬픈 민족의 현실이자 6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한국에 대한 이미지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폐허 뒤, 국가재건의 기반이 될 수밖에 없는 건설과 현재 수출대국 한국을 있게한 물류의 중심에서 대한민국의 발전과 함께한 스카니아코리아를 다시 돌아보고자 한다.
1960년대 근대화 시기에 한국시장에 소개된 스카니아 트럭은 전쟁 후 폐허가 된 국가 기반시설 건설 현장에 투입되었다. 변변한 국산트럭이 부재했던 시기에 스카니아 트럭의 그 위용과 효율성은 수입덤프트럭 시장을 리드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황토빛 도시와 정리되지 않았던 국가의 외모는 세계에서도 손꼽이는 스카이 라인을 자랑하는 서울을 수도로 가진 곳으로, 국토의 70%가 산으로 이루어진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도로와 물길, 그리고 하늘길로 국토의 구석구석을 연결하는 교통망을 보유한 곳으로 바뀌었다.
경제규모 세계 16위를 자랑하는 한국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IT인프라를 자랑하는 나라이기도하며 다양한 문화 컨텐츠를 생산하여 한류붐을 일으키며 소프트 파워의 선봉에 나서고 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국가의 기본 인프라 확충 부재시 불가능했을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과정들에 그리고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 스카니아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애정을 보여준 스카니아맨들과 늘 함께 해 왔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지금까지의 한국의 발전상에 적용하기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적어도 인천에서는 ‘5년이면’으로 줄여 말해야 할 듯하다. 송도국제도시, 청라지구, 영종지구, 검단신도시, 인천공항철도, 도심재생사업, 2009년 도시엑스포, 2014년 아시안게임 등 굵직한 호재들을 바탕으로 인천이 탈바꿈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인천지역의 새 얼굴로 떠오른 송도국제도시는 변화의 핵심이다. 인천 남서측 해안매립지에 약 173만평 규모로 조성되는 송도는 동북아 비즈니스 허브로 도약을 꿈꾸며 ‘국제 비즈니스를 위한 계획도시’로 설계돼 개발되고 있다. 2014년까지 약 200억 달러가 투입되는 민간주도의 대규모 개발사업이다. 또한 최근 개통된 인천대교는 교통량 세계 5위를 자랑하는 그 위용으로 인천 앞바다의 전망까지도 하루 아침에 바꾸어 놓았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2010년 개통을 앞두고 있는 제3 경인 고속도로와 제2 서울 외관순환 고속도로 역시 착공에 들어가 교통여건이 나날이 개선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러한 인천의 발전 뒤에는 이를 위해 분주히 달린 많은 종사자들이 있지만 특히 많은 건설업체들의 굵은 땀방울이 모여 또하나의 기적을 이뤄내고 있다. 토목 공사에 쓰이는 골재와 토사를 납품하고 건설 폐기물을 운반하는 일을 하는 봉신개발 역시 인천의 발전과 함께하고 있다.
“인천에서 건축 일을 한 것은 2003년도부터 였습니다. 그때 수많은 지입 트럭들이 있었는데 스카니아 트럭이 독보적인 역할을 해내더라구요. 독립하면서 봉신개발의 트럭은 모두 스카니아로 결정했습니다. 다른 상용차 브랜드에서 수없이 차량 구매를 부탁해왔지만 스카니아가 모든 면에 있어서 월등히 좋은 걸 어쩌겠습니까?”라고 봉신개발 김성윤 사장은 말한다.
그동안 굵직한 공사 현장에서 봉신개발의 스카니아 트럭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고, 2014년 아시안 게임 때까지 더욱 바쁘게 보낼 것이라 한다. 또한 인천대교가 완공되었기에 영종도까지도 갈 수 있는 범위가 되며 검단, 장기, 양천 등에 이르는 구간 등이 모두 봉신개발이 활약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한다.
“제가 봉신개발이라고 이름 지었잖아요. 나랏일을 많이 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어요. 실제로 관급 공사가 많아요. 건설경기가 살아나는 것이 봉신도 발전하는 것이고 인천 지역도 발전해 나가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대한민국이 더욱 살만한 국가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라고 김사장은 소신있게 말했다.

한국 경제에서 건설 관련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막대하다. 도로ㆍ철도ㆍ댐 등의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를 통해 건설산업은 경제발전의 근간을 만들어 왔다. 주택공급을 비롯, 신도시ㆍ해외건설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 중에 하나다. 도로역시 1970년 당시 총연장 4만㎞였던 것이 지금은 10만㎞ 정도로 늘어났고 세계 다섯번째로 고속철도를 도입했으며 주택건설 역시 1970년 인구 1,000명당 140가구에서 지금은 280가구로 두배가 되었다.
건설산업의 부흥은 스카니아 트럭의 활약을 더욱 눈부시게 만들었다. 스카니아 트럭이 한국에 최초로 소개된 시점이 1967년이었으니 한국 최초의 고속도로인 경인고속도로 준공보다도 앞선 시기였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을 시작으로 건설 경기가 살아나면서 1978년 스카니아 트럭은 정식 판매되기 시작했다. 그후 30여년간 스카니아 트럭은 국내 수입대형트럭 시장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지켜왔다. 지난해 1만대 판매를 기록했지만, 공식 판매되기 이전의 판매량까지 더하면 약 1만 2천여대의 트럭을 판매해 수입상용차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건설로 국가기반 인프라를 마련하고 성장의 기반을 다졌다면 수출은 오늘날 대한민국 발전을 지속시켜준 멈추지 않는 엔진이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우리자신 마저도 ‘천연자원이 부족하고 국토의 2/3는 산으로 이루어져 인구밀도가 높은…’의 공식이 익숙한 한국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수출이 필수사항이 아닐 수 없었다.
1964년 수출액이 1억 달러에 불과했고 수출품목 역시 주석, 김, 텅스텐, 오징어 심지어 돼지털과 같은 제품을 수출했던 한국은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한 섬유 및 경공업 제품 위주의 수출로 1977년 100억 달러를 달성했다. 경제 발전이 본격적으로 이뤄지던 1980년대 이르러서는 기술이 향상되면서 기술 중심의 공업 제품이 수출을 주도하기 시작하고 기계, 금속 등의 제품이 주요 수출품목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1985년에는 300억을 돌파, 10년 후인 1995년에는 1000억 달러를 달성했다.
이런 수출현장에서도 스카니아 트럭의 활약은 돋보였다. 상원 로지스틱에서 물류 수송을 했던 이점화 사장. 스카니아 470 터보 컴파운드 트랙터로 삼성전자의 물류를 6년여 동안이나 담당한 이사장은 구미 공장에서 수출용 휴대폰을 인천공항까지 운송하는 일을 매일 했다고 한다. “6년동안 일하면서 수출물량이 늘어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목격 했습니다. 2002년부터 일을 했는데 계속 7톤 물량을 가득 싣고 인천공항으로 향했지요. 가슴이 뿌듯했습니다. 대한민국의 휴대폰이 전세계로 판매되고 제가 그 제품들을 무사히 운송하는 일 자체가 보람되었죠.”
한국의 수출규모는 이제 4,220억 달러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1964년의 수출액 대비 4,220배 성장이다. 건설과 수출입 물류, 대한민국 경제활동의 큰 두개의 축에서 스카니아 역시 지난 40년간 꿋꿋이 제몫을 해왔다.
스카니아의 활약은 남북간 경제협력부문에서도 빛을 발한다. 2007년부터 개성에 있는 강사, 즉, 모래를 운송하는 일을 하는 금마건영의 최현숙 고객.
“통행제한이 없을 때는 하루에 10번씩 왕복하고 통행제한이 있는 경우는 5~6번 정도예요. 많다고요? 왕복 11km 밖에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예요. 그처럼 가까운 곳을 수십년 동안 가지 못했으니까 그런 점에서는 여러 생각이 들지요.”
북한에 오가기 위해서 많은 절차가 필요했다고 한다. 서류상의 절차뿐 아니라 통일부에서의 교육도 있었고 북한에서도 통제하는 것이 너무도 많았다고 한다. 한국에는 강사가 많이 남아있지 않은 것에 비해 개발이 되지 않은 개성 쪽은 우리네 30여년전 강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한다. 개성에서 내려온 모래는 파주 근교 아파트 단지 건설 현장이나 도시 가스관 공사 현장에서 사용된다고 하니 남북한 경협의 결과물은 생각보다 더 우리생활 가까이에 있다.
건설산업이 굵직한 해외 플랜트 사업을 수주할 정도로 성장하고, 전세계 소비자들이 선망하는 첨단 전자제품 수출 대국이 되고, 경제력을 토대로 북한을 아우르면서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위치에 이르기까지 오늘날의 대한민국으로 거듭나는 구비구비스카니아는 함께 해왔다. 스카니아 트럭이 대한민국의 상품을 싣고 한반도를 넘어 러시아를 통과해 유럽을 횡단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


